@Furud_ens (가게로 들어와 커피 한 잔을 시키곤, 프러드의 테이블 맞은편 의자에 서류 가방을 놓았다. 젖은 바닥과 뒹구는 찻잔을 무감히 내려다보다가,) 종업원, 여기 좀 치워 주십시오. (프러드와 마주 본다.) 좋은 아침입니다, 차관님. 이건, (서류 가방의 손잡이를 가볍게 쥔다.) 말씀하신 그 서류들입니다.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지금 이관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Furud_ens (밤샘은 하루이틀 한 게 아니다. 피곤해하는 기색도 내보이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상부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절차에 맞춰 전달하는 게 관료의 미덕입니다. …요즘 일이 바빠 신문도 통 읽지 못했군요, 읽으시던 신문에선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요? (자리가 치워지면 서류 가방을 테이블 위로 옮기곤, 앞자리에 앉는다.)
@Furud_ens 아뇨, …새로운 내용이 없다면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현상 유지만 된다면 다른 것은 제 몫이 아니므로. 다만… (그가 서류 가방을 가져가도록 두면서 말을 잇는다.) 전쟁에 관해 어떻게 쓰여 있는지 알고 싶다고는 생각했습니다. …9월 1일부터 시작된 ‘반정부 단체의 호그와트 점거’를 전쟁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퍽 많더군요.
@Ludwik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마음이 완전히 넘어와 있지 않으니 당신은 이렇듯 부자연스러울 만큼 충실한 것이다. 가정에서 안정을 느끼는 아이일수록 투정을 부릴 줄 알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양상과도 유사하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부유감이야말로 루드비크 칼리노프스키라는 인물을 그 자신으로 만드는 요소일 것이다. 이 사회에 *정말로* 완전히 안착한 루드비크라니.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패배이자 자아의 상실이 아니겠는가. 그런 모습은, 실은 그렇게까지 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논설위원으로 가도 되겠군요. 당신의 견해가 옳습니다. 그런 식으로 사회 불안을 선동하는 서술은 없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서류 가방 위에서 손가락이 두드리듯 움직인다.) 신경쓰이냐는 질문은 신문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Furud_ens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프러드와 제 사이에 놓인 커피잔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각설탕 세 개를 집어넣고 젓는다. 그의 행동은 일견 평범하게 상사와 커피를 마시는 관료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대여섯 살 먹은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듯 부자연스러웠다.) 서류에 관해서는 제 관할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설탕이 점점 녹아든다.) 신경써선 안 될 문제라고도… 생각했고요. 전 차관님의 명령대로 이행했고, 앞으로도 이행할 뿐입니다. 하지만 향후 계획은 여쭈어 봐도 괜찮겠군요. 제가 무엇을 준비해두면 좋을지 미리 아는 편이 효율적일 테니까요.
@Ludwik (당신은 정말로 어린 소년 같다. 명령 이행이라는 말과 무감한 태도, 직위, 외견상의 나이 같은 것으로 감추었을 뿐 관심 있는 것에 솔직히 관심을 표하고 정말로 싫은 것에는 열정을 보일 줄 모른다. 당신은 당신이 어른이 되어야 하는 세계를 잃었으므로 자라지 않는다. 소꿉놀이에서 아무리 아버지 역할을 맡아도 실제 어른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프러드는 당신의 건조한 관심 표현에서, 어릴 적 자신과 이야기하던 소년을, 그리고 당시의 요나스 미슈스티나와 동향임을 강조하고 싶어하던 소년을 본다. 문득 단순한 호의가 묻는다.) 뭘 준비하고 싶습니까?
@Furud_ens …한 가지 고백하자면. (세상에 안착하지 못한 소년은 모든 것에 적응한 어른 앞에서 직고한다.) 차관님의 협력 요청을 받아들일 때, 저는…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 애가 절망해서 죽으면 만족스러울 것만 같았습니다. … …그런데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시다시피, 모든 건 의미가 없고 다 지나가버린 일이잖습니까… 아마 이제 와 무엇을 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할 겁니다. 세상에는 너무 늦어버린 일이란 게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돌이킬 수 없는 일들 말입니다… (…너무 많이 말했다. 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덧붙였다. 사회에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속할 수 있는 유일한 곳에서나마…) 물론 모든 건 차관님의 결정으로 이루어질 겁니다. …차관님이 명령하시는 것이라면 뭐든 준비하겠습니다. 그뿐입니다.
@Ludwik (그러나 당신의 직고와 가장은 그 가라앉은 어조가 다르지 않다. 둘 다 절망에서 비롯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굉장히 통합된 인격이다. 형상은 다르지만 재로 빚어진 것은 마찬가지인.) 어제 심문실 117호에서 화재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인명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내부는 거의 불탔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재를 바람에 날아가게 하지 않고 형상으로 머물게 하는, 당신을 빚은 아교는 무엇인가? 그것이 궁금했다. 기능과 현상 유지에 필요한 물기 이상을 띠지 않는 눈이 당신을 바라본다.)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고 했죠. 그럼 당신은 그때 왜 죽지 않았습니까?
@Furud_ens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설탕이 잘 녹아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허니컷 차관님’으로부터 배운 행동이다. 그렇게 표정을 감추고 얼마간의 시간을 벌고 나서,) 허니컷 차관님, 이 얘기는… (‘그다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애써 삼켰다. 관료라면 상관이 묻는 말엔 대답을 해야 한다. 거짓말하는 한이 있어도. 하지만 어째서인지 거짓말이 나오지 않는다.) … …
소문이 차관님에게까지 전해졌을 줄 몰랐습니다. (잔을 내려놓는다.) 곧 복구할 수 있을 겁니다. 물건은 새로 구하면 됩니다. 아니, 이건 차관님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없겠군요. 저는…
(서류 가방을 본다. ‘내가 지은 죄다.’ 제 코트를 내려다본다. ‘죄 짓는 대가로 받은 것이다.’ 제 앞의 상관을 본다. ‘나와 함께 죄를 짓는 사람이다.’ 입술은 저절로 움직인다.) 아직 벌을 덜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덜 고통받아서… … (…) 죽을 수 없었습니다.
“돌려주겠습니다.”
프러드가 말한다.
“저는 이제 어머니와 대화가 잘 돼서 이 책이 더 필요하지는 않거든요. 당신은 아직도 자식들을 생각하며 많이 고민하고 있으니 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죠.”
https://docs.google.com/document/d/1A-4gFLdgkXWxxYZaYEhLJnuKvkm12dZeVIr-FQHDt5g/edit?usp=sharing
@Furud_ens (과거였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틈새에서 인간을 바라본다면 하물며 전쟁범죄자조차도 이해받을 만한 구석을 가지고 있어. 동시에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받은 혁명가조차도─혁명은 시대와 또 다른 시대를 부딪치는 일이기에, 이따금 어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낭떠러지로 몰아넣는다는 거, …나도 알아─ 틈새에서는 일개 개인이자 살인자, 동시에 이해받을 만한 구석이 있는 누군가로 전락하지. 넌 맨날 거기서 세상을 보고 모든 사람들을 보며 틈새에 머물지 않는 게 상상이 안 된다고 해. 하지만 난 그게 싫다고!… 사람을 동정하지 말란 말이야!”
한때 그는 동정받으면 얕보이는 줄 알던 소년이었다. 짐승이 적수 앞에서 털을 크게 부풀리듯 허세를 부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어렸던 프러드 허니컷 앞에선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땐 우리 모두 어렸으니 때때로 저 혼자 어른 같던 모습 때문은 아니다.
@Furud_ens 4학년 즈음까진 두 사람의 키가 비슷한 속도로 자랐음에도 프러드는 항상 딱 맞는 교복을 입고 완벽한 신사이자 마법사처럼 다녔다. 그것이 호그와트를 다니긴커녕 마법사 세계에 제대로 소속될 수조차 없었던 부모가 자식을 내보이고자 다한 최선이었음을 이해하기엔 식견이 부족했다. 이런 건 국경에만 병사를 배치해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그의 고백에도 그랬다. 너를 보면서 헐렁하고 낡아빠진 제 교복을 많이 부끄러워했노라 고백하고 싶진 않다고, 어린 루드비크는 다만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자신을 설명하려 기꺼이 시도하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너에 대해서는 부러워했다고.
그 말마저 전할 수 없는, 전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고. 초로의 나이가 된 루드비크는 재차 생각한다. 사실 소년 무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가족끼리 올바른 대화를 하는 법: 특히나 부모와 자식을 위하여〉, 오래전 자신이 선물했던 책의 표지를 다시 보며 떠오른 게 고작 어린 시절이어서.
@Furud_ens 미로스와프 헤르마셰프스키를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받들고, 비록 안 맞는 교복을 입고 안 맞는 땅 위에 서 있었을지언정 너와 시답잖은 말장난이나 하던 시절이 그리워서. 아니, 나는 아직도 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것 같아서, 그로부터 전혀 자라지 못한 것 같아서… … 그런데도 미련을… 일말의 사랑을 내버리지 못해서… … 이 지경이 되고도.)
(낙엽이 떨어진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는 두 손으로 책을 받아들어 펼쳤다. 그러지 않는다면 놓칠 것 같았다. 루드비크의 조그만 목소리는 종업원이 새 손님을 맞이하는 인사말에 거의 묻혔다.) 예전에… 예전이란 건 스무 해 전의 일인데… 네가 언쇼 부부의 고서점에서 일하고, 내가 아무것도 안 하던 그 시절에… 같이 밤하늘을 보곤 했잖아, 아니, 했잖아요. 그때 우리가 보던 것은 같은 하늘이 아니었던 것만 같아요. 파니 허니컷과 우주 얘길 하던 나날에 그걸 느꼈습니다.
@Furud_ens 이젠 너희 어머니와 대화가 잘 된다니 기쁜 일이지만. 나와 다른 우주를 본다는 건 조금 슬퍼서. 틈새도 다 같은 게 아닌 거 같아서, 그냥. 그냥 그랬다고. …요. (뒤죽박죽 섞인다. 그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어서 자존심만 강한 소년이었다가 상관과 함께 부역하는 관료였다가 한다. 과거에서 추방당했으나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 또 미래로 나아갈 도리밖에 없는 이의 불화였다. ‘모두가 과거를 추억한다면 차라리 현재와 미래 따위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위즌가모트의 의원이자 마법 사고 및 재난부 차관으로 잘 알려진 프러드 허니컷과 머글 사회에서 법적으로 실존하는 에드워드 브레넌이라면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현재에서, ‘지금’, ‘분명히 여기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드비크가 알면서도 부정하는 사실 하나: 루드비크 또한 지금 분명히 여기에 있다. 무의 늪으로 가라앉는 그에게도 시대와 발맞춰 걷는 프러드에게도 21세기는 공평하게 다가온다.
@Furud_ens 자라지 못한 소년도 자식을 둘 둔 아버지가 되었고, 시들어 죽어버린 차나무는 낙엽 한 장이나마 남겼듯이. 존재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쩌면 그렇기에,) 제가, …제가 왜 이런 얘길 하냐면.
나와 다른 네 앞에서 많이 부끄러워했던 것 같아. (하지 못했던 말을 하고 싶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고…
그러니까, 지금도. 지금도 그래. 내가 선물했던 이 책을 보고도 자식들 생각보다 먼저 그 애들이 태어나기도 이전의 일들이 떠올랐어. 에드워드 브레넌과 함께 걸었던 거리를 떠올렸고, 지금 내가 하는 고민은 자식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너에게 옛 친구를 파멸에 몰아넣을 서류 가방을 전달한 나에 대해서, 내 죄에 대해서였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 …죄송합니다. 그래도 받을게요. 받겠습니다.
@Furud_ens (그는 살라먹힌 시대와 함께 재가 되고 싶었지만 울면서 살아남겨졌다. 아니, 살아남기로 택해버렸다. 너절한 인간성은 피니트 인칸타템을 읊조리던 그날처럼 이번에도 책을 받아든다. 끌어안는다. 21세기인이 될 수 있을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는 다만 밤하늘과 오두막집에 대해 생각한다. 별들이 재정립된다. 폭풍우가 몰려온다. ‘패전’이 지척이다. 더는 우리가 순응키로 택한 세계에서─프러드는 성공했고 루드비크는 아주 조금 성공했지만, 선택의 결과는 같았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한다.)
…고맙습니다.
@Ludwik 자식 문제에 참고하라는 것도 다 핑계야, 루드비크. 나는 이제 그런 식으로, 무의식적일 정도로 앞뒤를 번지르르하게 맞추어 말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뿐이니까. 내가 어머니와 잘 지내게 된 것도 십 년이 넘었으니 내가 이걸 계속 갖고 있던 건 순전히 상징적인 의미였지. 나도, ...... (목소리가 잦아든다. 우리가 서로 이 모습으로는 주고받을 수 없는 비밀을 이야기하듯이. 그러나 이제 우리가 이 모습 이외에 무엇으로 마주하겠는가?) 이 책에서 그 시절을 추억해. 프러드 아닌 에드워드와 네가 함께 거리를 걸었던 날들과, 내가 두 살짜리 미로스와프를 안고 비행기를 태우며 놀아 주던 시절을. 소속감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줄 신념이 부재한 채 맥빠진 사랑만 갖고 있었던 스물 하나의 루드비크 칼리노프스키를.
@Ludwik (프러드는 주전자에 남은 차를 새 찻잔에 따른다.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딸려나오는 찻잎 찌꺼기 얼마까지 남김없이 따라 머금는다. 그 동작은 어쩌면 점점 쓴 차를 마시곤 하던 과거의 어느 시점을 닮았다.) 과거는 죽지 않았고,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았을 터야.* 물건들이 불타도 거기 얽힌 네 과거는 여전히 네 안에 살아 있겠지. 그리고 이 책은, 이것도 상징적인 물건일 뿐이지만, 그 과거 외에도 *우리가* 사랑하는 다른 과거들 또한, 지금의 네가 살아가는 데 의미 없지 않으리라는 걸....... 나도 그런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루드비크. (가방을 챙겨 일어난다. 당신의 어깨를 두드린다. 친구처럼.) 네 안의 과거들을 죽이지 말고 잘 해 봐.
(* "The past is never dead. It's not even past." - William Faulkner)
@Furud_ens 알아, 핑계인 거. 아는데… (그의 시선이 테이블 위 떨구어진 낙엽에 가 닿는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그것은 열린 창문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에 의해 또다시 어딘지 모를 어딘가로 향한다. 엎지른 찻물처럼 점원에 의해 정리될 수도 있고, 바람을 타서 어찌저찌 거리까지 나갈 수도 있다. 그러다 행인의 발에 짓밟혀 으스러질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은 무언가의 흔적을 남길 것이며 흔적은 어쩌면 유의미를 뜻한다… … ‘아니. 아니야. 이런 거 전부 끼워맞추기라고…’ 하지만 루드비크는 통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다못해 추모와 추억으로 남겨둔 낙엽마저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아는데, … …그래도 고맙다고 하고 싶었어. 이 책 읽을 거야. …잘 해 보는 방법은 여전히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내가 너에게 흔적을 남겼으므로. 네가 나에게 흔적을 남겼듯이.)
@Furud_ens 그래, 어떻게든. (어깨에 닿는 온기를 느낀다. 마지막으로 그는 말한다.) …너무 오래 거짓말쟁이로 살아온 것 같다. 너나, 나나.
이제 그렇게는 살지 말아야 할 시대가 왔어. (프러드가 가게에서 나가고자 문을 열면, 낙엽은 가을바람과 함께 거리로 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