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ed: 2024년 08월 24일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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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wik

2024년 08월 24일 00:42

(한밤중. 그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지도 오래되었고, 포위가 시작된 뒤부터는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처럼 마법부 건물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서는 도저히 잠들 수 없었지만 전투에 뛰어들 수도 없었다. 누구 편에서 싸워야 한단 말인가?… 오늘 밤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결국 택한 것이─잠들 수 없던 밤이면 늘 그랬듯─ 독서다.)

(반파된 어느 카페 앞에 앉아 시집을 펼쳤다. 가로등에 의지해 소리 내어 읽는 것은 영어로 번역된 조국의 시¹였다.)

다른 곳은 어떤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 지구에서는 모든 것이 꽤나 풍요로워.
여기서 사람들은 의자와 슬픔을 제조하지,
가위, 바이올린, 자상함, 트랜지스터.
댐, 농담, 찻잔들을.

어쩌면 다른 곳에서는 모든 게 더욱 풍족할 수도 있어,
단지 어떤 사연에 의해 그림이 부족하고,
브라운관과 피에로기, 눈물을 닦는 손수건이 모자랄 뿐.

(…)

Ludwik

2024년 08월 24일 00:43

그래, 알고 있어, 네가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쟁, 전쟁, 전쟁.
하지만 그 사이에는 늘 휴지기가 있게 마련이지.
주목!─사람들은 악해.
쉬어!─사람들은 선해.
주목하는 동안 황무지가 만들어지고,
쉬는 동안 피땀 흘려 집들이 지어져,
그리고 사람들은 그곳에 재빨리 정착하지.

(‘이것은 휴지기가 될까? 그동안, 사람들은 어떻게든 정착을 하고? …그리고 나도?’)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기 지구에서는 그 무엇도 작은 흔들림조차 허용되지 않아.

(그곳까지 읽고는 시집을 덮어버렸다. 두 눈을 감고 속삭인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기 지구에서는 그 무엇도 작은 흔들림조차 허용되지 않아… …

────
¹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여기Tutaj〉

Ludwik

2024년 08월 24일 23:11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전선으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 그는 그곳에 서서, 어젯밤 덮었던 시집을 다시 펼치더니, 같은 시의 마지막 연을 무미건조하게 마저 읽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폴란드어라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이해를 요하지 않는다. 불가해를 파헤치고 싶지 않다.)

가까이 와서 이것 좀 보라고.
탁자는 본래 있던 그 자리에 정확히 서 있어,
책상 위에는 본래 있던 그대로 종이가 놓여 있고,
반쯤 열린 창으로 한 줌의 공기가 스며들어오지,
벽에 무시무시한 틈바구니 따위는 없어,
혹시 널 어디론가 날려버릴지도 모를 틈바구니 따위는 말이야.

(왜냐하면 가까이에서 본다면 모든 건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틈바구니는 그저 틈바구니일 뿐이다. 그렇게 아주 긴 평화가 찾아온다,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of our time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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