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SW (지나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듯 그 앞을 막아선다.) 아직 한참인데 혼자서 어디 가냐. 기숙사?… 아, 부엉이한테 가는 건가.
@LSW 그리고 편지도 부칠 겸이겠지. 그 편지봉투, 너희 아버지… 판(Pan) 윈필드에게 보내려는 거 맞지? 무슨 내용인지 물어봐도… (말끝을 흐린 것은 순식간에 눈높이가 비슷해진 까닭이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쳤다…) …뭐, 뭐야. 지금 사람 놀려?! 네 아빠한테 다 말한다! (뭘 임마…)
@LSW (편지에 대해서는 간단히 까먹고 성낸다.) …시끄러워! 놀리는 거잖아! 나… 나도 180까지는 크고 싶었는데… 물론 지금도 충분히 남자답다고 생각하지만… 네 말대로 나폴레옹도 키는 나랑 비슷했고, 호네커나 레닌도 그렇고… 제길, 그치만 내가 그냥 백인이었으면 더 컸을 텐데… (궁시렁궁시렁… 하다가 뒤늦게 정신차리고 제 품에서도 편지봉투를 꺼낸다.) 어쨌든 내 용건은 이런 게 아니야!… 나도 부칠 편지가 있었어. … …키 갖고 안 놀리겠다고 하면 같이 가 줄게.
@LSW (단순하다.) 놀린 거 맞으면서…! 아, 됐어. 같이 가기나 해. (부엉이장으로 먼저 향했다. 뒤를 흘끔흘끔 보는 게, 레아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려는 모양…) 부치는 대상은… 음. 헬렌.
@LSW (그제야 앞만 보고 걷는다.) 아니, 다시 만나는 건 아니고… (이내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다.) …있잖아. 윈필드. 넌 졸업하면… 언제 결혼할 거야?
@LSW 남자랑 결혼하기 싫으면, 그럼 여자랑… 아니… 됐다. (한참 뒤 말을 이었다.) 헬렌이 나랑 결혼하고 싶대. 졸업하고 나면 같이 가정을 꾸리자더라. … …남편과 아버지가 된 내 모습이 상상이나 가?
@LSW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뒤돌아보았다가 그 눈빛과 마주쳤다…) …너도 의문이지? 나도 그래… 대체 왜 헬렌이 나랑 결혼하고 싶어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 같은 게 남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는데. (다시 앞만 보고 걷는다.) ‘같은 래번클로’로서 뭐 아는 거 없어?
@Ludwik 음. ...모르겠어요. 가설을 세워보죠.
첫째, 그때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당신을 사랑한다. 글쎄요.
둘째, 당신이 헬렌에게 어떤 식으로든 가치가 있다. 솔직히 이건 아닐 것 같아요. 제가 헬렌이었으면 이건 손해보는 장사거든요.
셋째, 루드비크 칼리노프스키는 사기결혼의 피해자가 될 예정이다. 제가 알 바 아니에요.
넷째... (이쯤에서 레아의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루드비크는, 보편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되려 눈길 가는 면이 있었지만... 그 눈길 가는 면을 서술하자면, 아집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것이 때때로 거울을 보는 듯하여 불쾌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데다 몇 년 안에 죽음을 먹는 자의 주문에 맞아 세상을 뜰 것 같다는 것이 레아의 판단이었다.)
...당신을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껴서 남편 노릇을 제대로 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부인이 되고 싶어한다. 첫 번째와는 조금 달라요.
@LSW (레아의 가설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어느샌가 도착한 부엉이장의 문을 열며 대답했다.) 네가 날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잘 알겠다… 너의 가설에 대한 내 생각도 말해 줄게.
첫째, 헬렌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로신에 관한 걸 아는 눈치였거든. 물론 이젠 관뒀지만.
둘째, 나도 아닐 것 같다는 데 동의해. 난 그냥 쓰레기고 빈대 같은 놈이지. 표도르 카라마조프 알아? 딱 그거라고. 적어도 사적인 면에서는… 그리고 여자들한테는.
셋째, 이게 제일 가능성 있겠네.
넷째, … …헬렌 성격에 안 맞지 않아? …그리고 내가 왜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는 거냐.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몇 년 안에 죽음을 먹는 자와의 전쟁 중 전사할 것이다. 알지만 멈추지 않을 뿐이다. 물가의 어린애가 파도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짓에 불과하다.) …종합하자면 나는 세 번째 가설이 옳다고 생각해. 근데, 그래도… 청혼은 수락할 거야.
…편지나 보내자. 네 것은 누구한테 보내는 거야?
@Ludwik 물론 보통은 결혼을 하는 게 맞죠. 서른이 되기 전에 자식을 봐서 잘 키우는 것도요. 그런데... 스스로가 쓰레기고 빈대 같은 놈인 걸 알고 헬렌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는데 대체 왜죠? 루드비크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가 될 생각이에요? (그렇게 반문하며 편지를 슬쩍 주머니에 집어넣음으로써... 누구에게 보내는 것이냐는 질문을 은근슬쩍 넘겼다. 반쯤은 이유를 묻고 싶은 것도 있었고. 그런 한편... 러시아의 이름 체계를 전혀 모르는 영국인의 발언이다.)
@LSW (‘전쟁 중에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어.’ 그러나 입을 열고 말았다. 왜, ‘대체 왜’인지 스스로가 가장 알고 싶었다.) 다 아는데 나랑 결혼해 줄 여자가 몇이나 되겠어?
… …그게 다야. 어차피 사랑으로 결혼할 수 있을 거 같지도 않고, 결혼하고 몇 년 지나면 사랑이 식는 경우도 많댔으니 다를 거 없고… 하지만… 그렇다 쳐도 내가 쓰레기인 건 맞아. (‘난 결국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청혼을 받아들였다. 남편이 될 거고, 아이를 가질 거다. 전선에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에도. 그리고 어쩌면 평생 스스로를 고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도.’) 하-하. (건조한 웃음소리 다음에 이어진 것은,) … …여담이지만, 기왕 그 소설 속 쓰레기 부친에 빗댈 거면 블라디미르 유리예비치 카라마조프라고 불러 줄래. (자조적인 농담이다.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제일 싫어한다.) 그만두자. 편지나 부치자니까… …
@LSW (화제가 일시적으로나마 바뀐 것에 내심 안도했다. 자기 편지에 관해선 줄곧 입을 다무는 레아가 의문스러웠으나.) 이걸 폴란드인에게 물어보는 건 뭔가 싶지만… 너희 영국인은 부칭을 미들네임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 말해 주자면, 그건 미들네임 같은 게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야. 내 아버지의 이름은 유리니까 난 유리의 아들이란 의미로 ‘유리예비치’가 되는 거지. 유리의 딸은 ‘유리예브나’가 되고. 이걸 너한테도 적용해 보자면… (우뚝 입을 다문다. ‘여자 아니라고 했는데. 그럼 뭐라고 불러야 돼?’)
@LSW 정확히는 칼리노프스카가 됐을 거야. 폴란드에는 부칭 개념이 없으니, 아버지가 붙여 준 러시아식 이름에만 붙고. (대답은 자연스러웠지만 속내는 기묘했다. ‘내가 여자아이로 태어났더라면?… 상상도 안 되고 기분이 이상하다. …그럼 모든 게 지금보다 나았을까, 오히려 별로였을까?’)
…아니, 음. 윈필드.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 (‘아냐. 사라질 때까지 묻어두어야 하는데. 괜히 헬렌 얘기를 꺼내버려서 파헤치고 싶어졌잖아!… 나는 왜 레아 앞에선 항상 이렇게 굴게 되는 거지?’) … …넌 이사코비치와 이사코브나 중 하나만 고를 수는 없는 거야? 아이작의 아들 혹은 딸이 될 순 없는 거냐고. …다들 그러고 살잖아. 여자는 남자랑 결혼하고, 남자는 여자랑 결혼하면서… 아이를 낳아 기르며… 그러다가… 죽겠지. (사회를 이루는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그게 왜 싫다는 건지 아직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아.
@Ludwik 저도 루드비크에게 말하기 전까지는 그게 당연했어요. 지금도 그게 맞다는 생각이 있고요. 그런데 그냥... 그러고 싶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세상 모든 게 이지선다가 아닌 것처럼요. 이게 오답이라고 해도. (팔짱을 낀다.)
당신이 헬렌과 결혼하려는 걸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그건 제 알 바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루드비크 당신이 제 아버지의 동료로서 하는 일을 생각해서... 그래서 하는 이야기예요. 사랑해서 결혼해도 몇 년 뒤면 식는다고 했죠. 그렇지 않은 결혼이면 그게 잘 흘러갈 것 같아요?
@LSW 그러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림자를 밟듯 레아의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그렇지만… 남들 시선은? 엄마가 나한테 실망하면?…’ 헬렌의 청혼에 수락하는 내용이 담긴 제 편지를 바라보았다. ‘내겐 이 길이 최선이다. 난 레아처럼은 할 수 없어.’) …몇 년 뒤의 일은 잘 모르겠어. 지금이 내 개인사가 중요한 시대는 아니기도 하고. 결혼생활이 결국 파탄나더라도… 글쎄, 뭐, 이혼하면 되겠지. 헬렌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는 어떻게든 기르면 될 거고. (안일한 말이다.)
…중요한 건 내가 결혼을 한다는 사실 그 자체야. 결혼하면 어머니도 아버지도 기뻐할 거야, 나한테 실망할 일 없을 거라고. (헛헛한 웃음을 터뜨린다.) 난 그거면 족해… … 무슨 기분인지 알지? 너도 네 아버지를 사랑하잖아. 그러니까… 이해해?
@Ludwik 알죠. 어른들은 자식에게 기대하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말해두자면 저는... 루드비크 당신을 말리려던 게 아니라 좀더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란 뜻에서 묻던 거였어요. 그러니까 이해해요.
(루드비크가 그가 말한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어쨌든 큰 문제는 없을 테다. 멀리서 본다면 평범한 삶을 사는 시민들 중 하나로 보일 것이다. 스스로가 무리를 겉돈다는 느낌을 받지도 않은 채 맹렬히 앞만을 바라보면서... 그걸 상상하니 어쩐지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가만 보면 당신은 몸집도 자그마하면서 투우(황소) 같은 면이 있단 말이죠.
편지나 부쳐요, 엘 토로. 슬슬 내려가고 싶거든요. 새똥 맞기도 싫고.
@LSW …키 얘기 하지 말자고 했잖아. (허탈해져서 공용 부엉이에게 편지를 건넨다. 부엉이가 날아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이윽고 아주 조그맣고 억눌린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 …
이사코비치, 넌 편지 부쳤어? …네 말대로 이젠 내려가자.